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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레테
연락처 : rainlethe@rainlethe.com 영혼을 잃어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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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8 05:21 RL.N ovel.

태호에게는 몹시 피곤한 하루였다. 아침 일찍 있을 회의에 발표할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느라 새벽부터 출근해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오늘따라 잔소리많은 부장에게 자주 불려갔으며, 지친 하루를 마무리하고 퇴근길에 받은 전화는 그의 피로를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전화는 대학 때 만나 결혼을 약속한 지희에게였는데, 내용인 즉슨 두학번 선배인 철규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쉬고싶은 마음을 뒤로한 채 태호는 자동차에 지희를 태우고 상가로 향해야 했다.
모처럼만에 대학 동창인 성.환.과 희석, 그 외에 선후배들을 만나는 것은 좋았으나 계속 웃고 있기에는 태호는 너무 지쳐있었다. 결국 그는 지희가 여기저기 반가운 티를 내며 인사를 하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결국 태호가 향 냄새와 억지스러운 쾌활함을 가장한 집에서 나온 것은 한 두시간만 있으면 동이 틀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옆자리에 탄 지희가 벌써 네시가 다 되었단 말을 하지 않았으면 그것조차도 모를 만큼 그는 지쳐있었다. 운전하는 동안 쉴새없이 조잘거리던 지희도 기운이 빠졌는지 조용했고, 차안은 한물 간 대중가요만이 공간을 채웠다.
"여기가 어디야?"
멍하니 창밖을 보고있던 지희가 중얼거린 말에 태호는 그제서야 자신이 길을 잘못 들어 조금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전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했어야 했는데 직진을 해버린 탓에 산 하나를 빙 돌아야 하는 일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유턴 지점을 급하게 찾은 태호의 눈에 표지판이 하나 보였다.
-터널 지난 후 유턴 가능-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런 표지판 자체가 이상하고, 거의 집근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터널은 한번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터라 의심해볼 만도 했건만 이미 피곤으로 지친 태호의 판단력으로서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 단지 산 하나를 돌기보다는 유턴 쪽이 빠르겠다는 습관적 운전버릇이 핸들을 터널쪽으로 돌리게 했을 뿐이다.
터널 안은 한가했다. 아직 차량이 많은 시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태호의 차 이외의 차량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전구 몇 개가 나갔는지 부분부분 깜빡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철규선배... 어떤 교통사고인데 즉사야?"
"글세.. 거기까진 잘 모르겠어."
"그나저나 이 터널 굉장히 기네.."
말을 건내며 무의식중에 태호는 지희를 돌아보았다. 태호의 말에 지희의 시선이 오른쪽 창밖에서 태호쪽으로 향하다 말고 정면에 못막혔다. 그와 동시에 지희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깜짝 놀라 앞을 쳐다본 태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의 차 앞에 왠 SUV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중앙선을 넘어 달려오고 있었다. 태호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힘껏 핸들을 꺽었다.
다음 순간 끼익 소리와 함께 쿵 소리가 터널 안에 울려퍼졌다.

태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사방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실명이라도 한 듯이 여겨질 정도로. 하지만 점차 어둠이 눈에 익고 나자 실명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느정도 어둠속을 볼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뒷 목과 왼쪽 팔꿈치가 욱신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의 사고시 부딛힌 모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연히 길을 잘못 들었다지만 가까운 동네인데도 한번도 못들어본 터널, 그런 터널 안에서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고 중앙선을 넘어온 차량. 여기까지는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해도,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태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은 혼자 남아 있는 것인가. 타고 있던 승용차는 어디로 갔으며 그 옆좌석에 앉아있던 지희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지희가 걱정이 되었다. 주머니를 뒤지자 다행히도 왼쪽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만져졌다. 급하게 꺼내 폴더를 열었다. 하지만 그 화면에는 '통화권 이탈'이라는 멘트만 보여졌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핸드폰의 시계에 따르면 지금은 오전 7시 20분. 해가 뜨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이곳은 캄캄하다. 즉, 외부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히 터널 안이었으니 형광등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승용차의 행방 등을 생각한다면, 누군가가 사고를 당한 자동차와 지희를 두고 자신만을 이 알 수 없는 곳에 옮겨놓았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내 태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세상 그 누가 자신이 그곳에서 사고가 날 것을 알았으며, 그 순간에 잽싸게 자신을 이런곳에 두고 갔단 말인가. 시간에 따르면 사고가 난 지 2시간 남짓 되었을 뿐이다. 사고난 자신을 끌어내서 이런데 데려오는데 불가능한 시간은 아니지만, 치밀한 계획이 아니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고는 우발적이었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태호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어쨌든 이렇게 있을수만은 없었다. 눈이 아무리 어둠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흐릿한 형태만 보일 뿐이었다. 태호는 아까 집어넣었던 핸드폰을 다시 꺼내 주위를 비추었다. 아주 짧은 가시거리와 한정된 시야의 폭으로 잘 식별하기는 어려웠으나 이곳은 아무래도 마치 오래되어 폐쇄된 탄광같은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바닥에 석탄은 아니지만 비슷한 크기의 크고작은 돌맹이들이 구리고 있고, 삽으로 파고들어간 갱도처럼 주위 폭이 성인 2명이 나란히 서기 어려울 정도로 좁았다.
다시 태호의 왼쪽 팔꿈치가 욱신거렸다. 아무래도 가벼운 골절상인 듯 했다. 움직일 수는 있으나 고통을 수반했다. 태호는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바꿔 쥐고는 때아닌 동굴탐사를 계속했다.
일단은 한쪽 방향을 정해 걸어가기로 하고 태호는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발걸음을 뗐다. 채 열걸음이나 걸었을까. 태호는 벽에 부딛혀 멈춰서야 했다. 그의 앞에는 주위와 어울리지 않게 깔끔한 벽이 이 이상한 장소의 한쪽 끝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치 전문 시멘트업자가 정성스럽게 반죽하여 만들어낸 듯 매끈한 벽이었다. 이 벽으로 인해서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길밖에 안남았군'이라는 불확실한 믿음만이 태호에게 남겨졌다.
그때였다. 할 수 없이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태호에게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악! 오지마!!!"
지희의 목소리였다. 어딘가 근처에 지희가 있었다. 태호는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일단, 그녀를 찾아야 했다. 다음일은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고.
태호는 막힌 벽 반대쪽으로 달려나갔다. 곳곳에 커다란 돌들에 걸려 넘어질 뻔 하기도 했으나 그런 자잘한 일보다는 지희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
약 1분여나 달렸을까. 사방이 돔 형태로 둘러쌓여 소리가 울리는 탓에 지희의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으나 점점 그녀의 비명이 커지는 것을 보아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운동부족인지 숨이 차오르는 것을 더는 참지 못하고 태호는 멈춰섰다. 아직도 지희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핸드폰 불빛으로 주위를 살피던 태호의 눈에 구석진 곳에 웅크린 물체가 보였다. 지희였다. 지희는 태호가 가까이 갈 때까지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태호가 손을 대자 그녀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저리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지희야. 나야. 태호."
그때서야 웅크린 몸을 펴고 고개를 든 지희의 얼굴은 눈물투성이였다. 마스카라가 번져 검은 눈물이 흐르는 것이 핸드폰 불빛에 비쳤다.
지희는 태호의 얼굴을 보고는 순간 움찍하더니 이내 와락 태호에게 안겼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태호가 지희를 안고 다독거리자 지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어깨만 들썩였다. 아무래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철규선배. 철규 선배가..."
철규 선배라면 아까 상가에서 그 죽음을 확인한 사람 아닌가. 갑자기 왜 지희가 철규선배 이름을 올리는지 태호는 궁금했다.
"아까.. 그 ..SUV차.. 분명히.. 철규.. 철규 선배가.. 그..그리고.. 방금...전에.. 너.. 오기..전까지..바로..앞에.."
지나친 흥분과 두려움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지희를 안고 태호는 생각에 잠겼다. 얘가 아직 사고 쇼크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라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자 지희 어깨의 들썩임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리고 조금은 소금기가 마른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 정말..철규선배가.."
"알았어. 너 충격이 컸었나보구나. 괜찮아. 나 이제 여기 있잖아. 일단 여기서 나갈 방법부터 생각해보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기는 하지만, 태호는 지희의 말을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사고의 그 짧은 순간에 상대편 운전자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은 말도 안돼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망자가 이곳에 덜컥 나타난 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마 아는 사람의 죽음이 자신의 사고와 연상작용을 했기 때문이라고 태호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희의 말을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태호는 지희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까 한쪽 벽이 시멘트로 막혀 있었으니, 반대편은 밖으로 통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의 통행이 가능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자신들이 이곳에 있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
태호의 손끝에서 지희가 떨고있는 것이 느껴졌다. 태호는 지희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왼쪽 팔꿈치의 고통이 힘을 준 만큼 더 강하게 와닿았다. 핸드폰은 벌써 8시를 표시하고 있었다. 처음 깨어난 지 40분이 지난 셈이다. 태호는 어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슬슬 배도 고파왔고, 무엇보다도 희망을 잃기는 싫었다.
"자, 조금만 걸어나가면 출구가 나올꺼야. 걸을 수 있겠어?"
희미한 공기의 파동으로 지희의 끄덕임이 느껴졌다. 태호가 걸음을 옮기자 순간 지희가 멈칫하는 것이 손 끝에 전달되어졌다.
"왜? 무서워?"
"아니..저..그게..아까..그쪽..가봤는데..큰..바위같은걸로.. 막혀있어..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캄캄한데.. 철규선배가..피범범이 된 채로.. 파르스름한 빛을 띄고..."
지희는 말을 간신히 이어나가다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아 버렸다.
태호는 망연자실했다. 지희 말에 따르면 이 동굴같은 곳은 양쪽이 다 막혀있는 셈이 된다. 즉, 나갈 길이 없는 것이다. 태호와 지희를 여기다가 가둔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태호는 급격한 분노를 느꼈다. 자신들을 가둬두고는 어떻게인지 모를 방법으로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그때였다. 계속 불빛을 비춰주던 핸드폰이 삐삑 소리를 냈다. 혹시 통화가 가능해졌나 싶어 액정을 본 태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low battery라는 메시지만이 표시되고 있었다.
"지희야. 너 핸드폰 가지고 있어?"
분노 때문에 떨리고 있는 태호의 목소리에 지희는 순간 흠칫했다.
"아니.. 나 가방안에 있는데.. 아까 정신차려보니까.. 가방이 없어."
그때 드디어 핸드폰 배터리가 완전 방전되었다. 순간적으로 찾아온 완전한 어둠. 누군가가 눈가리개를 몇겹으로 해 둔 느낌에 태호는 몸서리쳐졌다.
이제 태호와 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둘 다 상가에서 밤을 새서 피곤한 상태인 데다가, 사고가 났었고, 이상한 곳에 갖혀버린 정신적 피로까지 겹쳐 둘은 더할 나위 없이 지쳐있었다.
"할 수 없지. 기다리는 수 밖에.. 조금씩 돌아가면서 쉬자. 나 조금만 잘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깨우고.."
바닥에 돌맹이가 수없이 굴러다니는 곳에서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이렇게라도 쉬어두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태호가 지희의 손을 잡고 한쪽 벽면에 기대어 잠을 청한지 5분 정도나 되었을까. 어렴풋이 잠이 들려던 태호에게 갑자기 지희의 비명이 들렸다. 깜짝 놀라 깨어난 태호는 지희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왜그래?"
"저..저기..철..철규 선배가... 저기... 안보여..?"
태호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캄캄한 어둠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지희 조차도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지희가 있는 위치조차도 모를 정도로 주변은 암흑속이었다. 특히 눈을 감았다가 뜬 직후라 아직 시신경이 주변에 적응되지 못해서 더욱 그랬다. 태호는 한숨을 내 쉬고는 지희의 몸을 자신쪽으로 당겼다.
"많이 힘든가보구나.. 먼저 좀 자 둬."
"정말..안보여..? 저기..저기에.. "
태호는 별 대답 없이 자신의 점퍼를 벗어 지희에게 덮어주었다. 조금 쉬고 나면 안정될 거라는, 근거는 없지만 유일한 믿음만 가지고.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잠든 지희의 무게를 느끼면서, 태호는 상황이 절망적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갈 길도 없고, 불빛도 없으며, 식량도 없다. 유일한 희망은 여기에 가둔 녀석이 꺼내주기만을 바라는 것인데, 그것조차도 별로 실현가능성이 없었다. 일부러 가둔 녀석이 뭣하러 꺼내주겠는가.
태호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부정적인 결과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건 말도 안돼, 왜 하필 나야. 내가 누군가에게 무슨 몹쓸 짓을 저질렀나.. 화가 솟구쳐서 분노가 될 때쯤 지희가 깨어났다.
"아. 태호야. 덕분에 잘 잘어. 그런데..배고프지 않아??"
여자라는 건 엄청나게 감정변화가 심한 동물이다. 좀전까지만 해도 죽은 사람이 보인다더니 해서 난리를 치던 인간이 지금은 배가 고프다니. 태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그 기분이 좀전의 분노와 결합해서는 자신도 모르게 지희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배고프지 않냐고? 응! 그래! 그래서 어쩔껀데.. 응? 돌이라도 씹어먹을꺼야? 아니면 서로의 생살이라도 씹어먹을까? 왜? 너 혼자 있을때는 철규 선배 귀신이 보이더니. 잠잘땐 괜찮냐? 내가 자려고 할때는 보이고? 응?"
망연자실하게 태호의 독기 어린 말을 듣고 있던 지희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 말 못하고 흐느끼고 있는 지희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태호는 자신이 너무 심했음을 깨달았다. 화를 내야 할 대상은 지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방금 전 독설을 퍼부어놓고 바로 사과하는 것이 어쩐지 머슥하기도 했고, 왠지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 같아 태호는 마음속으로는 사과의 말을 고민하고 있으면서도 선뜻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다시 지희가 소리를 질렀다. 날카로운 소리가 밀폐된 공간에 울려퍼졌다.
"철.. 철규선배.. 미.. 미안해요..아 .. 아아.. 제발.."
또 지희에게 헛것이 보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 미안해요라...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고 하는 것인지 태호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알기로는 철규선배와 지희는 겨우 안면만 있을 뿐 아무런 친분관계가 없다고 알고 있었다. 지희는 그 떨고있는 공포감이 태호에게 전달될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아.. 나.. 사실.. 선배가.. 더.. 좋았는데.. 태호.. 돈.. 때문에.."
태호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아무리 극한 공포감에 짓눌린 결과라고 해도. 결혼 약속까지 한 지희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게다가 지희 말대로라면 둘은 태호 몰래 만나고 있었다는 말 아닌가.. 순간적인 흥분으로 이성을 잃은 태호는 다짜고짜 괴성을 지르며 지희에게 달려들었다.
어둠 탓이었을까. 흥분 때문에 몸이 마음대로 말을 듣지 않은 것일까. 그만 태호는 어둠속에서 바닥의 돌을 보지 못했다. 돌부리를 딛어 넘어진 그의 앞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공포감에 질려 떨고 있던 지희가 두 발을 딛었다. 지희는 전혀 떨지 않고 있었다.
다음 순간 태호는 머리에 둔탁한 느낌을 받았다. 커다란 돌 같은 둔기가 부딛힌 것이었다. 아프다..라는 느낌도 없었다. 그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는 것 뿐이었다. 얼굴에 끈적한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억지로 손을 뻗어 지희를 잡으려는 태호의 손은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태호가 정신을 잃으면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불합격"이라는 지희의 냉정한 목소리였다.
태호가 완전히 정신을 잃고 나자 지희는 커다란 바위로 가로막혀 있다던 곳을 통해 조.수.석.으로 걸어나갔다.

옆자리를 보자 지희가 무료하게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심심함이나 달랠까 하고 성.환.은 지희에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태.호.'녀석 말야.. 교통사고가 어떻게 났는데.. 즉사야?"
"글세.. 그것까진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이 터널 굉장히 기네.."
다음순간, 지희의 비명이 터졌다. 성.환.은 달려오는 자동차를 피하기 위해 급하게 자동차를 조작했다.
다음 순간 끼익 소리와 함께 쿵 소리가 터널 안에 울려퍼졌다.
깜박거리는 터널 등에 비친 상대편 승용차의 운전자는.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고 있는 '태.호.'였다. 

05.03.25. By RL.N.

posted by 레인레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