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날이 지났다. 지나갔던 시간은 모두 잊혀져야 정상일, 수두룩히 많
은 시간이 가버렸다. 걸어올 때는 더없이 길었던 날들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순식간에 압축되어 짧아져 버렸다.
그제서야 난 깨닫는다. 그와의 추억은 이제 몇 조각 남지 않았다는 것
을. 무심코 내 일상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작은 흔적만이 과거를 기억할
뿐 나머지는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지워져 버렸다. 내 기억도. 흐릿한 자
욱만 남긴 채 그렇게 휴지통에 버려졌다.
꼭 이때쯤에서 음악이 들려야 할 듯 했다. 마치 영화처럼 주인공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관객에게는 큰 효과를 발휘하는. 내 감정을 표현하는 무언
가의 소리가 들려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소리없는 소설의 주인공
일 뿐이라서 음악따위는 듣지 못한다. 들리는 것은 도시의 잡음 뿐. 자동
차의 클렉션 빵빵대는 소리. 쌩하니 자동차가 내 옆을 스치는 소리. 끼
익 하는 브레이크 소리등 음악이라기보다는 잡음에 가까운 소리만 나를
감싸고 돈다.
나는 CF의 주인공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주위 사물은 빠르게 빠르게 나
를 스쳐 지나가는데, 얼굴조차 흐릿한 그들은 자기 갈 길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는데. 나는 서 있다. 갈 길도 정하지 못한 채 나는 서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가 내 일상에서 떠나간 것은. 늘 꿈꾸던 그가 옥상에
서, 자신은 날아오르겠다며 뛰어내린 순간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날 떠난 것은 훨씬 이후이다. 나는 잔상 안에서 헤메고 있었다.
나는 그를 꿈꾸는 새라 불렀다. 말이 화근이 되었는지 그는 진짜 새가 되
어 저 세상으로 날아가 버렸지만.
언제나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반짝이는 눈이 생각난다. 처음에 그에게 이
끌렸던 건 그 눈 때문이었지. 아. 그의 눈은 감겨지고 더 이상 반짝이지
않게 되었지만. 내 기억속에서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의 얼굴이 제대
로 기억나지는 않아도. 그의 눈만은 명확히 떠올릴 수 있다.
그는 무엇을 꿈꾸고 있었을까? 아마 자유였을 것이다. 진짜 자유. 허울
좋고 실속 없는 허수아비 자유가 아닌 당당한 권리로서의 자유. 타인에
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최
대한 충실한 자유. 그래서 날개를 달고 싶어했고, 결국 일생의 단 몇 초
만은 평생의 소원을 이루며 죽어간. 말 그대로 자신을 불태운 죽음을 맞
이한, 나의 꿈꾸는 새.
"난 날아오를꺼야. 고작 이 좁은 공간에 갖혀서, 평생 뜻대로 못한 채 남
에게 맞춰가야 한다는 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진짜 새를 아니? 진짜 새
라는 건, 우리 주위를 돌아다니는 흔해빠진 비둘기 따위를 말하는 게 아
냐. 사람들이 주는 모이나 받아먹으면서 자신의 털을 더럽히는 종자 말
고, 정말로 하늘을 나는 거야. 참새같은 것처럼 어디를 갈 수 있는 데도
동네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어디든 자신의 날개로 날아오를
수 있는 거지. 자신의 날개짓으로 바람을 가르면서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새. 멋지지 않아? 결국 그 새는.. 절대자유의 세계로 가는 거지."
그 말을 할 때 그는 세상을 향한 당당한 몸짓과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순간만은.
그는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절실히 바라던 자유의 세계에 있을까? 아니
면 힘찬 날개짓으로 어딘가의 바다위를 박차오르고 있을까. 그의 시체는
가루가 되어 초라하게 뿌려졌지만 진짜 그는.. 어딘가에.. 분명히..
"넌 결혼 안하냐!?"
"에이 엄마도.. 좋은 사람 생기면 한다니깐요."
"이놈아 그게 몇 번째야. 네 동창 성철이는 아주 참한 색시를 데려왔드
만. 곧 결혼한데더라."
"엄마도 참.."
웃으면서 넘기지만 가슴 한 구석이 아프다. 언제까지 속일수만은 없는
데. 아직도 그같은 사람을 찾아 헤메고 있다 말하기엔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주위의 질타는 그냥 웃어넘길 수 있어도 내가 그 말을 하는 순
간 어머니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기에...
나 어렸을 때 홀로 되셔서, 외아들인 나를 뒷바라지 하느라 일생을 바치
셨는데. 저 주름은 괜스리 생긴 것이 아닐진데..
어째서, 어째서 세상은 이리 각박할까.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 해서 그
리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 않은가. 사랑의 대상이 동성이라고 해서 모두
다 손가락질하고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것이 정상인가. 다수의 사람들과
다르다고 해서 이상한 눈초리를 받는 것이 옳단 말인가..
몇 안되는 친구라 믿었던, 그 중에서도 가장 친하다 믿었던 사람에게 커
밍아웃을 한 적이 있었다. 술의 힘을 빌어 간신히 밝혔던 나의 성 정체
성. 내 말을 듣던 순간 그 사람의 일그러진 표정을 난 놓치지 않았다. 아
니나 다를까. 내 좋지 않은 예상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게 행동한 그는 정
상인답게. 나와의 연락을 끊어 버렸다. 참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어려움
도 많이 나누었으며 마음을 같이 할 친구라 믿었던 그 사람은. 나의 말
한마디로. 나를 벌레로 만들어 버렸다. 마디가 열두개 쯤 있고 온몸엔 털
이 가득해서 꿈틀거릴줄만 아는 쓸데없는 벌레로..
다른 몇 명의 친구(였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난 잊지 못할 것이다. 나
를 바라보던 경멸어린 시선들. 그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차가운 마음
에 눈물흘렸던 그 기억은 절대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칼로
가슴을 도려내 인을 배긴 것처럼 가슴속 깊이 간직할 것이다. 동성애자라
고 하면 남창쯤으로 생각하는 그 눈빛. 절.대.잊.지.못.할.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옥상에 와 있다. 내 영원한 연인 꿈꾸는 새가 날개
를 펼친 바로 그곳이다. 그가 그렇게 자신의 꿈속으로 날아가버린, 이 황
량한 옥상에 와 있다. 여기저기 묵은 먼지가 민들레씨앗처럼 굴러다니
고, 차가운 시멘트가 외부인을 거부하는 곳. 나는 정확히 꿈꾸는 새가 꿈
을 향해 날아오른 그 자리에 서 있다. 그가 서서 내게 중얼거리던, 그리
고 세상을 덮을 듯 빠르게 떨어져서는 검은 색 무표정한 아스팔트에 떨어
졌던 바로 그 난간 위에 나는 서 있다.
투둑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비? 소나기인가? 일기예보에는 비
가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아니 내가 오늘의 일기예보를 봤던가? 오늘 나
는 뭘 했지? 오늘은 며칠이지?? 주위 사물이 나를 중심으로 크게 한바퀴
회전하며 엿가락처럼 휜다. 혼란스럽다.
이제는 꽤나 무게가 실린 물방울이 떨어진다. 딛고 있는 자리가 위험하
다. 마찰이 적어져 미끄러질 수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겁이 나거나
하진 않는다. 휘어버린 건물들 사이로 여러 가지 이미지가 교차한다. 어
머니의 주름살과 눈물. 나를 비웃던 사람들. 그 눈초리와 기분나쁜 태
도. 그리고 나를 떠난, 이제는 타인이 되어버린 친구. 모두의 얼굴이 엇
갈린다. 큰 웃음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친다. 모두들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
웃는다. 이젠 지친다. 이젠.. 이젠..
차가운 빗속에 나는 흠뻑 젖는다. 알 수 없는 기분에 나는 허공으로 발
을 한 걸음 내딛는다. 나도 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내 연인 꿈꾸는 새의 날개처럼 거대하지는 않아도, 내 작은 희망을 이루
어 줄 작은 날개가 있다.
바람이 날 중심으로 갈라진다. 주위 사물이 빠르게 스친다. 아. 그가 보
인다. 분명 그이다. 나의 선구자 꿈꾸는 새. 그의 눈이 보인다. 언제나
허공만을 바라보던 그 눈이 날 보고 잇다. 예의 그 반짝거림을 잊지 않
은 채. 무언의 웃음이 느껴진다. 아까와는 다른 동질감의 웃음. 나도 빙
그레 웃음을 짓는다.
그래 나도 널 따라 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이제는 아무도 우
리를 멸시하지 않는 곳에서 우리 다시...
- 지독하구만. 머리가 으깨졌어. 이 뇌수 튄 것좀 보게. 이래서야 죽어
서 제대로 생각이나 할 수 있겠나.. 나 원. 대체 왜 자살따윌 하는건지
모르겠어. 벌써 똑같은데서 2번째야..
99.11.14-99.11.17 edit 03.09.12. By RL.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