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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처 : mail @ rainlethe.com 나는 날카로움을 잃어버린걸까? 아니면 따뜻함을 얻은걸까? 레인레테


단절

RL.N ovel. | 2005/11/18 05:17 | Posted by 레인레테
- 1 -

"나 예전에 임신했던 적 있었다."

혜정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머릿속에서 전자기타소리를 들

었다. 위잉~하고 슬라이드로 시작하는, 마치 기타를 중심으

로 하는 락그룹의 연주같은 소리를. 일레트릭 기타는 그렇게

한참을 몽환적으로 소리를 지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툭'하

고 3번줄이 끊어져 버렸다.

- 2 -

내가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작년 12월경이었다. 둘 다 수능

을 봤었고, 시험이 끝나자 할 일이 없던 처지였다. 나우누리

에 가입하고 그저 따분한 시간 죽이기용 채팅을 일삼던 때 난

그녀를 처음 알았다.


혜정은 소위 말하는 재수생이었다. 지난번 수능에서 답을 밀

려쓴 후, 1년 내내 공부만 했다고 한다. 이번 수능 결과는 그런

대로 만족한다며 '밀려쓰지만 않았다면'이라고 귀엽게 사족

을 달았다. 그녀의 말에 비추어 보건데, 고등학교때도 꽤나 공

부를 잘 했던 학생인 것 같았다. 여기까지가 내가 그녀와의

첫 채팅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 3 -

1999년 1월 13일. 수요일. 강남 CGV.12시. 혜정과의 첫 만

남 장소였다. 당시의 화재작이었던 '태양은 없다'를 보기 위해

서 만난 우리는, '비트'보다 조금 못한 '태양은 없다'를 보고나

서 일반적인 코스대로 밥을 먹고 가볍게 포켓볼을 치고 커피

숍에서 2시간쯤 이야기하다 헤어졌다. 어차피 이성으로써 만

난 게 아니었기에 서로 기대할 것도 없었고, 따라서 실망할 것

도 없었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실망할 만큼 최악은 아니었

는데다가 성격도 채팅 그대로였기에 우린 그냥 오랜만에 만

난 친구처럼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 4 -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채팅이라는 것은 언어에 마법을 걸

어 주기도 한다. 마치 오즈의 마법사가 가짜 마술로 양철인간

을 고치고, 사자를 용감하게 만들 듯이. 이 마법은 밤의 감수

성과 최고의 파트너가 되어 사람들을 홀연히 진실의 세계로

데려가곤 한다.

- 넌.. 네 자신이 좋아..?

사사로운 잡담을 하다가 갑자기 던진 그녀의 말은 순식간에

날 당황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네 자신이 좋아?? 무슨 뜻이

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자신감을 뜻하는 걸까?? 난 잠시

머뭇거리다가 '응'이라고 대답했다. 정말로 내 자신이 좋아 죽

을 지경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상황엔 그 말 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그래? ... 좋겠다.... 난 ...

난 모니터에 그녀의 다음 말이 떠오르길 기다렸다. 하지만

끝내 다음에 이어질 단어는 화면에 보이지 않았다. 다만

** 신혜정님이 접속을 해지하셨습니다 **


라는 단어의 나열만이 떠올랐을 뿐이다.


난감했다. 기다려야 하나. 그녀에게 전화를 해 봐야 하나. 잠

시 생각한 끝에 전화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의 짧은

말 속엔 우울한 진심이 들어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난 이 문

제는, 키보드로 시작한 만큼 키보드로 끝내야 할 것 같았다.

AM 1:46

AM 2:46

AM 3:15

결국 그녀는 그날 밤 다시 접속하지 않았다.

- 5 -
발 신 자 : 신혜정
제 목 : 미안...
보낸 시간 : AM 4:32

나야 혜정이. 아까는 그냥 나가버려서 미안해. 너 접속해지

시간 보니까 오래 기다렸던 모양이네. 다시 한번 진짜 미안.

그냥 좀 그렇더라구. 갑자기 너무 우울해서는. 너랑 얘기를

좀 하려 했었는데, 막상 말하려니까 생각이 정리가 안되는 거

야.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냥 두서없이 말해도 넌 다 알아들

을 수 있었을텐데. 헤헤. 어쩜 난 용기가 없었나봐. 진짜 나를

보여주기 무서웠나봐.


어제는 그렇게 접속을 끊고 침대에 누웠어. 조금 자면은 괜

찮아지겠지 싶어서.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네가 계속 기다릴꺼

라는.. 네 생각은 솔직히 못했고. 근데 이상하게 침대에 누워

도 잠이 안오는 거야. 그런 기분 알지? 몸은 너무나 피곤한데

잘 수가 없는 거. 마치 물먹은 솜이 한조각씩 분해되어 가면

서 흐느적거리는 것 같은 기분. 딱 그랬어. 결국은 그렇게 누

워서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면서 우울한 생각을 쫒으려 하

다가, 시계를 보니 어느새 4시가 훌쩍 넘었더라구..


다시 한 번 미안하구. 우리 기회가 되면 다음에 다시 얘기하

자. 안녕. 잘자.



- 6 -

시간은 가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했든, 혜정이가 어떻게 살

았든, 나와 혜정이와의 관계가 어떤식으로 변해가든간에 시계

바늘은 오른쪽으로 훌렀다. 그 후 혜정이와는 잡담 몇마디

뿐, 더 이상의 깊이있는 대화는 없었다. 그리고 난 모 대학의

학생이 되었다.



- 7 -

새내기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동기들이나 선

배들 얼굴을 익히고, 새로운 수업환경에 적응하고, 정신없는

삶을 사는 동안 혜정은 내 안에서 존재를 흐릿하게 하고 있었

다. 마치 유령이 벽을 통과할 때 스르르 사라지는 것처럼 그녀

는 조용히 내 마음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그

누구도 바라지 않지만 자연히. 당연히 그녀가 투명해진 것만

큼 그녀의 이야기는 살을 빼고, 빼고, 빼서 작은 콩팥만 해졌

다.


- 8 -

혜정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온 것은 4월 초쯤이었다. 수화기

에서 '나야'라는 말이 귀에 흘러들어왔을 때, 처음 만났을때

의 밝은 목소리와는 다른 낮은톤의 속삭이는듯한 목소리로 바

뀌었는데도 난 그녀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분명 그녀임에도

난 확인을 위해서 한번 더 물어야 했다. 누구... 라는 말이 떨

어짐과 동시에 그녀가 다시한번 말했다. '나라구'. 어쩐지 현

실감이 없는 목소리였다. 마치 수화기 저편에서는 무언가 알

수 없고 어두침침하며 음산한 것이 혜정의 흉내를 내는 것 같

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혜정이었다.


"어..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어쩌면 조금 목소리가 흔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네. 혹시 오늘 시간 있어?"

혜정은 여전히 그 낮은 음색의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다.

"응 시간 있어."

거짓말이었다. 오늘은 내가 속한 동아리의 총회 날이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그렇게 혜정을 거부하면 안될 것만 같은 생

각이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래서 난 그녀를 만나기로 했

다.

- 9 -

생각해보니 조금 한심해 보였다. 무언가에 끌려온 느낌. 그

렇다고 해서 싫은 기분은 결코 아니었다.


- 10 -

내 앞의 그녀는 변했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약간의 어폐가

있다. 정정컨대 그녀는 '분위기'가 변했다. 물론 겉보기엔 4개

월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조금 달라

진 게 있다면 옷의 두께 뿐. 그렇지만 그녀는 변했다. 무언가

가. 무언가가.

"나 학교 그만뒀어."

난 순간 흠칫했다. 재수해서 어렵게 들어간 학교를 그만두다

니. 그애가 얼마나 자신의 진학에 대해서 기뻐했는 지 아는

데..

"한 일주일 됐나.. 그정도 됐을꺼야. 잘은 모르겠지만. 곰곰

히 생각해 봤는데, 이게 뭔 가 싶어서.."

그녀가 얘기를 하는 동안 난 묵묵히 듣고 있었다. 솔직히 말

하자면 마땅히 대꾸해야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거니와, 침묵

하는 동안 그것이 더 그녀가 얘기하는 데 도움이 될 꺼라는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가 언젠가 너한테 네 자신을 좋아하냐고 물어본 적 있었

지? 그때 넌 응이라고 대답했었고. 맞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그 말을 듣자 그것이 키워드가

되어 나를 98년 12월의 파란 모니터 화면 앞으로 돌려놓았다.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그녀는 가만히 내 얼굴을 보더니 짧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

었다.

"솔직히 말할께. 내가 너에게 했던 얘기들. 다 거짓말이야.

고등학교 얘기나 재수, 기타등등의 이야기들. 심지어는 방금

말했던 대학 그만뒀다는 것 까지도. 지금 네 눈 앞에 보이는

난 네가 아는 혜정이가 아냐."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방금 들은 말은 무슨 뜻이지?

혜정인 혜정이가 아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그때도 그랬듯이

표현 능력이 그리 뛰어난 게 아니라서... 그냥 나오는 대로 말

할게. 이해해 줄 수 있으리라 믿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개를 끄덕이는 일 뿐이었다.


"너 그런 느낌 알아? 어느날 주위를 둘러봤는데 내 주변엔 아

무도 없는거야. 친구도. 가족도. 꼭 황량한 벌판에 혼자 서있

는 느낌.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가 듬성듬성 막 자라있을 뿐,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에. 마치 나만 존

재하는 듯한.."


혜정은 잠시 말을 끊고는 자신앞의 쥬스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뗐다.

"무서웠어. 그렇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방에 틀어박혀 얼굴 모르는 사람들과 나누는 겉보

기의 이야기 뿐이었지. 그러다가 널 만난거고. 지금에 와서야

고백하지만 나 너 만난것도 엄청난 용기 낸거야. 넌 행운아라

구."

그녀는 하던 말을 중단하고는 픽 웃었다.

"그래서?"

"그래서? 아 응. 그래. 내가 널 알면서 느낀 게 뭔 줄 알아?

난 헛살았다..라는 거였어. 이 나이를 먹을 때까지 주위에 사

람 하나 남겨놓지 않았다니. 나에 비해 넌 행복해 보였어. 잘

은 모르겠지만 늘 사람들 사이에 둘러쌓여 있었고..."

그랬던가? 난 그런 점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휴. 어쩌면 난 널 보면서 대리만족했던 건지도 몰라. 나 담

배 하나만 피울게."


내가 약간은 놀란 목소리로 '응'이라고 하자 그녀는 자신의

백에서 담배를 꺼내고 능숙한 포즈로 불을 붙였다. 내가 아는

혜정인 담배나 술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애였는데..


"놀랐니? 나 이거 한 지 꽤 됐는데. 너 알기 전에도. 음.. 얘

기 계속할게. 하여튼 어쩌다보니 넌 내 주위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버린 거야. 난 절대 널 놓치기 싫었지. 다시 황량한 벌판

으로 돌아가긴 싫었으니까. 그래서 난 나를 조금씩 포장해서

는 네게 내놓았어. 너에게 알맞은 혜정이로. 내 말 이해할 수

있겠니?"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란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일뿐이었다.


"어느새 난 원래의 나와 너의 혜정이와의 두 역할을 하게 된

거지. 그런데 이거 .. 처음엔 괜찮더니 나중에 시간이 지나니

까 두가지 역할의 괴리감이 생겨버리더라구. 꼭 징검다리 중

에 처음과 끝만 있고 중간은 없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이

두 역할이 헷깔리기 시작했어. 아무리 두 역할의 성격이 판이

하다 해도 연기하는 건 나 하나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결

국은.. 내가 너한테 네 자신을 좋아하냐고 물은 날까지 오게

된거야."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구나. 혜정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

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이걸 다 설명하려 했어. 그 날. 그런데, 도저히 자신

이 없는거야. 네가 날 싫어할까 봐."


분명히 그랬다. 지금 나는 이 상황을 머리로 이해하되 몸으

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어느 공포영화처럼 머리

를 손으로 들고다니는 사람같았다. 아아.. 힘들다. 그리고 무

언가가 내 안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바닥으로. 와장창 쨍

그랑 쾅.

"그 날 이후론 어쩐지 네게 말걸기가 무서워져서. 그냥. 그렇

게 된 거야."


난 여전히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응. .

"마지막으로, 진짜 내 얘기를 할게. 이름은 박민혜고 나이

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고통없이 벙어

리가 된 것 같았다.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고막으로 느껴지

는 웅-소리만이 내 주위를 감싸고 돌았다.

내가 그렇게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어지러워하고 있을 때 혜

정, 아니 민혜가 다시 말을 했다.

"나 옛날에 임신했던 적 있었다."


- 11 -

끊어져버린 기타줄은, 다시는 사용할 수 없다. 반드시 다른

것으로 교체해야만 한다. 새 줄은, 소리가 매우 좋긴 하지만,

다른 줄들과 조율을 하고 길들이려면 꽤 오래 걸릴 것이다. 특

히 쉽게 끊어지지 않는 3번줄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99년. 소설과는 전혀 관계없는 수업시간에 심심해서... By RL.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