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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레테
연락처 : rainlethe@rainlethe.com 영혼을 잃어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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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L.N ovel.'에 해당되는 글 7

  1. 2005/11/18 터널
  2. 2005/11/18 별이 바람에 스치우다
  3. 2005/11/18 꿈꾸는 새
  4. 2005/11/18 단절
  5. 2005/11/18 Cat's eye
  6. 2005/11/18 인형의 꿈
  7. 2005/11/18 Marlboro
2005/11/18 05:21 RL.N ovel.

태호에게는 몹시 피곤한 하루였다. 아침 일찍 있을 회의에 발표할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느라 새벽부터 출근해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오늘따라 잔소리많은 부장에게 자주 불려갔으며, 지친 하루를 마무리하고 퇴근길에 받은 전화는 그의 피로를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전화는 대학 때 만나 결혼을 약속한 지희에게였는데, 내용인 즉슨 두학번 선배인 철규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쉬고싶은 마음을 뒤로한 채 태호는 자동차에 지희를 태우고 상가로 향해야 했다.
모처럼만에 대학 동창인 성.환.과 희석, 그 외에 선후배들을 만나는 것은 좋았으나 계속 웃고 있기에는 태호는 너무 지쳐있었다. 결국 그는 지희가 여기저기 반가운 티를 내며 인사를 하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결국 태호가 향 냄새와 억지스러운 쾌활함을 가장한 집에서 나온 것은 한 두시간만 있으면 동이 틀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옆자리에 탄 지희가 벌써 네시가 다 되었단 말을 하지 않았으면 그것조차도 모를 만큼 그는 지쳐있었다. 운전하는 동안 쉴새없이 조잘거리던 지희도 기운이 빠졌는지 조용했고, 차안은 한물 간 대중가요만이 공간을 채웠다.
"여기가 어디야?"
멍하니 창밖을 보고있던 지희가 중얼거린 말에 태호는 그제서야 자신이 길을 잘못 들어 조금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전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했어야 했는데 직진을 해버린 탓에 산 하나를 빙 돌아야 하는 일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유턴 지점을 급하게 찾은 태호의 눈에 표지판이 하나 보였다.
-터널 지난 후 유턴 가능-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런 표지판 자체가 이상하고, 거의 집근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터널은 한번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터라 의심해볼 만도 했건만 이미 피곤으로 지친 태호의 판단력으로서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 단지 산 하나를 돌기보다는 유턴 쪽이 빠르겠다는 습관적 운전버릇이 핸들을 터널쪽으로 돌리게 했을 뿐이다.
터널 안은 한가했다. 아직 차량이 많은 시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태호의 차 이외의 차량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전구 몇 개가 나갔는지 부분부분 깜빡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철규선배... 어떤 교통사고인데 즉사야?"
"글세.. 거기까진 잘 모르겠어."
"그나저나 이 터널 굉장히 기네.."
말을 건내며 무의식중에 태호는 지희를 돌아보았다. 태호의 말에 지희의 시선이 오른쪽 창밖에서 태호쪽으로 향하다 말고 정면에 못막혔다. 그와 동시에 지희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깜짝 놀라 앞을 쳐다본 태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의 차 앞에 왠 SUV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중앙선을 넘어 달려오고 있었다. 태호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힘껏 핸들을 꺽었다.
다음 순간 끼익 소리와 함께 쿵 소리가 터널 안에 울려퍼졌다.

태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사방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실명이라도 한 듯이 여겨질 정도로. 하지만 점차 어둠이 눈에 익고 나자 실명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느정도 어둠속을 볼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뒷 목과 왼쪽 팔꿈치가 욱신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의 사고시 부딛힌 모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연히 길을 잘못 들었다지만 가까운 동네인데도 한번도 못들어본 터널, 그런 터널 안에서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고 중앙선을 넘어온 차량. 여기까지는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해도,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태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은 혼자 남아 있는 것인가. 타고 있던 승용차는 어디로 갔으며 그 옆좌석에 앉아있던 지희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지희가 걱정이 되었다. 주머니를 뒤지자 다행히도 왼쪽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만져졌다. 급하게 꺼내 폴더를 열었다. 하지만 그 화면에는 '통화권 이탈'이라는 멘트만 보여졌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핸드폰의 시계에 따르면 지금은 오전 7시 20분. 해가 뜨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이곳은 캄캄하다. 즉, 외부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히 터널 안이었으니 형광등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승용차의 행방 등을 생각한다면, 누군가가 사고를 당한 자동차와 지희를 두고 자신만을 이 알 수 없는 곳에 옮겨놓았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내 태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세상 그 누가 자신이 그곳에서 사고가 날 것을 알았으며, 그 순간에 잽싸게 자신을 이런곳에 두고 갔단 말인가. 시간에 따르면 사고가 난 지 2시간 남짓 되었을 뿐이다. 사고난 자신을 끌어내서 이런데 데려오는데 불가능한 시간은 아니지만, 치밀한 계획이 아니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고는 우발적이었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태호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어쨌든 이렇게 있을수만은 없었다. 눈이 아무리 어둠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흐릿한 형태만 보일 뿐이었다. 태호는 아까 집어넣었던 핸드폰을 다시 꺼내 주위를 비추었다. 아주 짧은 가시거리와 한정된 시야의 폭으로 잘 식별하기는 어려웠으나 이곳은 아무래도 마치 오래되어 폐쇄된 탄광같은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바닥에 석탄은 아니지만 비슷한 크기의 크고작은 돌맹이들이 구리고 있고, 삽으로 파고들어간 갱도처럼 주위 폭이 성인 2명이 나란히 서기 어려울 정도로 좁았다.
다시 태호의 왼쪽 팔꿈치가 욱신거렸다. 아무래도 가벼운 골절상인 듯 했다. 움직일 수는 있으나 고통을 수반했다. 태호는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바꿔 쥐고는 때아닌 동굴탐사를 계속했다.
일단은 한쪽 방향을 정해 걸어가기로 하고 태호는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발걸음을 뗐다. 채 열걸음이나 걸었을까. 태호는 벽에 부딛혀 멈춰서야 했다. 그의 앞에는 주위와 어울리지 않게 깔끔한 벽이 이 이상한 장소의 한쪽 끝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치 전문 시멘트업자가 정성스럽게 반죽하여 만들어낸 듯 매끈한 벽이었다. 이 벽으로 인해서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길밖에 안남았군'이라는 불확실한 믿음만이 태호에게 남겨졌다.
그때였다. 할 수 없이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태호에게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악! 오지마!!!"
지희의 목소리였다. 어딘가 근처에 지희가 있었다. 태호는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일단, 그녀를 찾아야 했다. 다음일은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고.
태호는 막힌 벽 반대쪽으로 달려나갔다. 곳곳에 커다란 돌들에 걸려 넘어질 뻔 하기도 했으나 그런 자잘한 일보다는 지희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
약 1분여나 달렸을까. 사방이 돔 형태로 둘러쌓여 소리가 울리는 탓에 지희의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으나 점점 그녀의 비명이 커지는 것을 보아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운동부족인지 숨이 차오르는 것을 더는 참지 못하고 태호는 멈춰섰다. 아직도 지희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핸드폰 불빛으로 주위를 살피던 태호의 눈에 구석진 곳에 웅크린 물체가 보였다. 지희였다. 지희는 태호가 가까이 갈 때까지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태호가 손을 대자 그녀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저리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지희야. 나야. 태호."
그때서야 웅크린 몸을 펴고 고개를 든 지희의 얼굴은 눈물투성이였다. 마스카라가 번져 검은 눈물이 흐르는 것이 핸드폰 불빛에 비쳤다.
지희는 태호의 얼굴을 보고는 순간 움찍하더니 이내 와락 태호에게 안겼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태호가 지희를 안고 다독거리자 지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어깨만 들썩였다. 아무래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철규선배. 철규 선배가..."
철규 선배라면 아까 상가에서 그 죽음을 확인한 사람 아닌가. 갑자기 왜 지희가 철규선배 이름을 올리는지 태호는 궁금했다.
"아까.. 그 ..SUV차.. 분명히.. 철규.. 철규 선배가.. 그..그리고.. 방금...전에.. 너.. 오기..전까지..바로..앞에.."
지나친 흥분과 두려움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지희를 안고 태호는 생각에 잠겼다. 얘가 아직 사고 쇼크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라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자 지희 어깨의 들썩임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리고 조금은 소금기가 마른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 정말..철규선배가.."
"알았어. 너 충격이 컸었나보구나. 괜찮아. 나 이제 여기 있잖아. 일단 여기서 나갈 방법부터 생각해보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기는 하지만, 태호는 지희의 말을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사고의 그 짧은 순간에 상대편 운전자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은 말도 안돼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망자가 이곳에 덜컥 나타난 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마 아는 사람의 죽음이 자신의 사고와 연상작용을 했기 때문이라고 태호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희의 말을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태호는 지희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까 한쪽 벽이 시멘트로 막혀 있었으니, 반대편은 밖으로 통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의 통행이 가능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자신들이 이곳에 있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
태호의 손끝에서 지희가 떨고있는 것이 느껴졌다. 태호는 지희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왼쪽 팔꿈치의 고통이 힘을 준 만큼 더 강하게 와닿았다. 핸드폰은 벌써 8시를 표시하고 있었다. 처음 깨어난 지 40분이 지난 셈이다. 태호는 어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슬슬 배도 고파왔고, 무엇보다도 희망을 잃기는 싫었다.
"자, 조금만 걸어나가면 출구가 나올꺼야. 걸을 수 있겠어?"
희미한 공기의 파동으로 지희의 끄덕임이 느껴졌다. 태호가 걸음을 옮기자 순간 지희가 멈칫하는 것이 손 끝에 전달되어졌다.
"왜? 무서워?"
"아니..저..그게..아까..그쪽..가봤는데..큰..바위같은걸로.. 막혀있어..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캄캄한데.. 철규선배가..피범범이 된 채로.. 파르스름한 빛을 띄고..."
지희는 말을 간신히 이어나가다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아 버렸다.
태호는 망연자실했다. 지희 말에 따르면 이 동굴같은 곳은 양쪽이 다 막혀있는 셈이 된다. 즉, 나갈 길이 없는 것이다. 태호와 지희를 여기다가 가둔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태호는 급격한 분노를 느꼈다. 자신들을 가둬두고는 어떻게인지 모를 방법으로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그때였다. 계속 불빛을 비춰주던 핸드폰이 삐삑 소리를 냈다. 혹시 통화가 가능해졌나 싶어 액정을 본 태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low battery라는 메시지만이 표시되고 있었다.
"지희야. 너 핸드폰 가지고 있어?"
분노 때문에 떨리고 있는 태호의 목소리에 지희는 순간 흠칫했다.
"아니.. 나 가방안에 있는데.. 아까 정신차려보니까.. 가방이 없어."
그때 드디어 핸드폰 배터리가 완전 방전되었다. 순간적으로 찾아온 완전한 어둠. 누군가가 눈가리개를 몇겹으로 해 둔 느낌에 태호는 몸서리쳐졌다.
이제 태호와 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둘 다 상가에서 밤을 새서 피곤한 상태인 데다가, 사고가 났었고, 이상한 곳에 갖혀버린 정신적 피로까지 겹쳐 둘은 더할 나위 없이 지쳐있었다.
"할 수 없지. 기다리는 수 밖에.. 조금씩 돌아가면서 쉬자. 나 조금만 잘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깨우고.."
바닥에 돌맹이가 수없이 굴러다니는 곳에서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이렇게라도 쉬어두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태호가 지희의 손을 잡고 한쪽 벽면에 기대어 잠을 청한지 5분 정도나 되었을까. 어렴풋이 잠이 들려던 태호에게 갑자기 지희의 비명이 들렸다. 깜짝 놀라 깨어난 태호는 지희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왜그래?"
"저..저기..철..철규 선배가... 저기... 안보여..?"
태호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캄캄한 어둠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지희 조차도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지희가 있는 위치조차도 모를 정도로 주변은 암흑속이었다. 특히 눈을 감았다가 뜬 직후라 아직 시신경이 주변에 적응되지 못해서 더욱 그랬다. 태호는 한숨을 내 쉬고는 지희의 몸을 자신쪽으로 당겼다.
"많이 힘든가보구나.. 먼저 좀 자 둬."
"정말..안보여..? 저기..저기에.. "
태호는 별 대답 없이 자신의 점퍼를 벗어 지희에게 덮어주었다. 조금 쉬고 나면 안정될 거라는, 근거는 없지만 유일한 믿음만 가지고.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잠든 지희의 무게를 느끼면서, 태호는 상황이 절망적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갈 길도 없고, 불빛도 없으며, 식량도 없다. 유일한 희망은 여기에 가둔 녀석이 꺼내주기만을 바라는 것인데, 그것조차도 별로 실현가능성이 없었다. 일부러 가둔 녀석이 뭣하러 꺼내주겠는가.
태호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부정적인 결과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건 말도 안돼, 왜 하필 나야. 내가 누군가에게 무슨 몹쓸 짓을 저질렀나.. 화가 솟구쳐서 분노가 될 때쯤 지희가 깨어났다.
"아. 태호야. 덕분에 잘 잘어. 그런데..배고프지 않아??"
여자라는 건 엄청나게 감정변화가 심한 동물이다. 좀전까지만 해도 죽은 사람이 보인다더니 해서 난리를 치던 인간이 지금은 배가 고프다니. 태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그 기분이 좀전의 분노와 결합해서는 자신도 모르게 지희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배고프지 않냐고? 응! 그래! 그래서 어쩔껀데.. 응? 돌이라도 씹어먹을꺼야? 아니면 서로의 생살이라도 씹어먹을까? 왜? 너 혼자 있을때는 철규 선배 귀신이 보이더니. 잠잘땐 괜찮냐? 내가 자려고 할때는 보이고? 응?"
망연자실하게 태호의 독기 어린 말을 듣고 있던 지희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 말 못하고 흐느끼고 있는 지희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태호는 자신이 너무 심했음을 깨달았다. 화를 내야 할 대상은 지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방금 전 독설을 퍼부어놓고 바로 사과하는 것이 어쩐지 머슥하기도 했고, 왠지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 같아 태호는 마음속으로는 사과의 말을 고민하고 있으면서도 선뜻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다시 지희가 소리를 질렀다. 날카로운 소리가 밀폐된 공간에 울려퍼졌다.
"철.. 철규선배.. 미.. 미안해요..아 .. 아아.. 제발.."
또 지희에게 헛것이 보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 미안해요라...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고 하는 것인지 태호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알기로는 철규선배와 지희는 겨우 안면만 있을 뿐 아무런 친분관계가 없다고 알고 있었다. 지희는 그 떨고있는 공포감이 태호에게 전달될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아.. 나.. 사실.. 선배가.. 더.. 좋았는데.. 태호.. 돈.. 때문에.."
태호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아무리 극한 공포감에 짓눌린 결과라고 해도. 결혼 약속까지 한 지희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게다가 지희 말대로라면 둘은 태호 몰래 만나고 있었다는 말 아닌가.. 순간적인 흥분으로 이성을 잃은 태호는 다짜고짜 괴성을 지르며 지희에게 달려들었다.
어둠 탓이었을까. 흥분 때문에 몸이 마음대로 말을 듣지 않은 것일까. 그만 태호는 어둠속에서 바닥의 돌을 보지 못했다. 돌부리를 딛어 넘어진 그의 앞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공포감에 질려 떨고 있던 지희가 두 발을 딛었다. 지희는 전혀 떨지 않고 있었다.
다음 순간 태호는 머리에 둔탁한 느낌을 받았다. 커다란 돌 같은 둔기가 부딛힌 것이었다. 아프다..라는 느낌도 없었다. 그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는 것 뿐이었다. 얼굴에 끈적한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억지로 손을 뻗어 지희를 잡으려는 태호의 손은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태호가 정신을 잃으면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불합격"이라는 지희의 냉정한 목소리였다.
태호가 완전히 정신을 잃고 나자 지희는 커다란 바위로 가로막혀 있다던 곳을 통해 조.수.석.으로 걸어나갔다.

옆자리를 보자 지희가 무료하게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심심함이나 달랠까 하고 성.환.은 지희에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태.호.'녀석 말야.. 교통사고가 어떻게 났는데.. 즉사야?"
"글세.. 그것까진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이 터널 굉장히 기네.."
다음순간, 지희의 비명이 터졌다. 성.환.은 달려오는 자동차를 피하기 위해 급하게 자동차를 조작했다.
다음 순간 끼익 소리와 함께 쿵 소리가 터널 안에 울려퍼졌다.
깜박거리는 터널 등에 비친 상대편 승용차의 운전자는.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고 있는 '태.호.'였다. 

05.03.25. By RL.N.

posted by 레인레테
2005/11/18 05:19 RL.N ovel.
모 동창 사이트의 중개로 모처럼만에 고교 동창들을 만났었

다. 만나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술자리밖에 없는 스물 네 살.

50여명의 급우들 중 스무명 남짓 되는 사람이 모인 자리는 시

끄럽기가 그지없었다.

술기운을 빌어 그 순간만 필요 이상으로 친해져 모두가 화기

애애하던 때, 난 한 녀석만이 구석에 틀어박힌 채 조용히 혼

자 자기 잔을 채우는 것을 보았다. 어렴풋하게 기억이 날 듯

말듯한 얼굴. 누구였었지.. 그때 내 옆에서 끝없이 화통한 웃

음소리를 내며 연거푸 술잔을 비워내던 A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이상우 쟤는 왜 왔데?"

A딴에는 귓속말이라고 한 거겠지만 남들이 듣기에는 충분

히 큰 목소리. 구석에 있던 이상우는 그 말을 듣더니 A와 내

가 앉은 쪽을 향하고는 쓴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처량한 미소

로 잠시 좌중을 둘러보던 그는 모두의 시선을 인식한 듯 아까

제 손으로 따랐던 술을 들이켰다. 잔이 술이 다 비워진 상태

로 테이블에 놓여지고 동시에 그는 벌떡 일어났다. 휘척대며

가방을 들고 자리를 벗어나는 그에게 여전히 뱃심좋고 생각없

기로 유명한 A는 한 마디를 던졌다.

"상우야! 회비 내고 가야지!!"

하나도 안 웃겼던 A나름대로의 개그는 술취한 동창들에게

는 폭소를 터트리게 만들었고 이상우의 발걸음을 더 빨라지

게 했다. 그렇게 녀석이 자리를 뜨고 나서도 한동안은 모두들

이야기거리가 생겼다는 것에 좋아라 하며 웃고 즐겼다. 아무

도 이상우의 기분 따윈 관심없는 것 같았다. 마치 그의 부재

가 동창들 전체를 한 마음으로 만들어버린 듯 했다. 이상우가

왕따였다느니 생각이 음침하다거니 고교때부터 해괴했다느

니 하는 말부터 시작해서 걔네 형도 정신병원에 있다더라, 아

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새 장가를 간 탓에 새 엄마와 여덟

살 차이밖에 안난다더라 하는 검증되지 않은 그의 가정사까

지 뒤척거리며 술자리를 참으로 화목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상우로 인해서 우리의 동창회는 마무리될때까지 즐

거움이 가득 묻어났다.


술이 깨고 내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느라 까맣게 잊어버렸

던 상우의 기억은 우리를 5년만에 만나게 해 주었던 모 동창

회 싸이트의 게시판으로부터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젠 .. 쉬고 .. 싶어...

단 두줄의 간단한 내용이었다. 상우의 글 밑에는 해가 지기

전에 가려 했지..부터 시작해서 별이 바람에 스치면 떨어져서

널 덮쳐주는거냐, 쉬고 싶으면 너도 형을 따라 언덕위의 하얀

집으로 가라.. 등 열 개 가까이 리플이 달려 있었다. 어떻게 봐

도 그리 좋게 봐줄 수 없는 내용들이긴 했지만 아마 상우가 이

렇게 많은 호응을 얻은 것은 처음일꺼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서 난 마지막에 -드디어 왕따를 벗어났구나 축하해 다들 널 이

리도 열렬히 환영해 주잖니? - 라고 달아줬다.


우리의 동창들은 모두 정이 넘쳐 흐른다.


여기서부터는 지금쯤 독자 모두가 예상했던 그대로이다.

상우 녀석은 편안히 쉴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7층 아파트에

서의 투신. 직접 내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사람들의 말에 따

르면 어떻게 봐도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일정한 속

도로 주차장을 향해 날던 그는 불행하게도 운이 없었다. 바로

아스팔트에 떨어졌으면 참 좋았을 것을. 하필 지나가던 택배

용 차량 윗면에 부딛혀 버렸다. 당연히 녀석은 그 충격으로 인

해 약 1-2M가량을 다시 지상으로 튕겨올랐다가 떨어졌고, 기

겁을 한 운전사가 내려서 상우를 볼 때까지 녀석은 살아있었

다. 언제나 신속정확한 119가 와서 병원으로 싫고 갈 때 까지

도.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아직도 살아있다. 다만 뇌사라

는 판정을 받은 채. 녀석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끊은 권리조

차 없었던 모양이다.

해파리가 파도에 휩쓸려 흐느적거리듯 자신의 의사결정과

는 관계없이 흘러온 스물 넷까지의 상우 인생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


Epilog.

추후에 이 소식을 들은 A는 여전히 큰 목소리로 상우에 대해

서 이야기했다. 그것은 녀석이 어떤 일을 겪었으며 어떤 상태

인가에 대한 궁금증이기는 했지만, 녀석 자체에 대한 그리움

은 아니었다. 다만 A는 술자리에서의 좋은 안주꺼리 하나가

또 생겼다는 그런 종류의 관심일 뿐이었다.


우리의 단합심 강한 동창들은 그런 A를 따라서 모두들 상우

를 그리워했다. 이 얼마나 좋은 결론인가. 상우는 편안히 쉬

고. 우리들은 상우를 생각하고. 모든 것은 잘 되어가고 있다.

상우의 별이 아직도 바람에 스치듯 쉬고 있을런지는 모를 일

이지만...


2003-2004년즈음에. By RL.N.
posted by 레인레테
2005/11/18 05:19 RL.N ovel.

많은 날이 지났다. 지나갔던 시간은 모두 잊혀져야 정상일, 수두룩히 많

은 시간이 가버렸다. 걸어올 때는 더없이 길었던 날들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순식간에 압축되어 짧아져 버렸다.


그제서야 난 깨닫는다. 그와의 추억은 이제 몇 조각 남지 않았다는 것

을. 무심코 내 일상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작은 흔적만이 과거를 기억할

뿐 나머지는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지워져 버렸다. 내 기억도. 흐릿한 자

욱만 남긴 채 그렇게 휴지통에 버려졌다.


꼭 이때쯤에서 음악이 들려야 할 듯 했다. 마치 영화처럼 주인공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관객에게는 큰 효과를 발휘하는. 내 감정을 표현하는 무언

가의 소리가 들려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소리없는 소설의 주인공

일 뿐이라서 음악따위는 듣지 못한다. 들리는 것은 도시의 잡음 뿐. 자동

차의 클렉션 빵빵대는 소리. 쌩하니 자동차가 내 옆을 스치는 소리. 끼

익 하는 브레이크 소리등 음악이라기보다는 잡음에 가까운 소리만 나를

감싸고 돈다.


나는 CF의 주인공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주위 사물은 빠르게 빠르게 나

를 스쳐 지나가는데, 얼굴조차 흐릿한 그들은 자기 갈 길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는데. 나는 서 있다. 갈 길도 정하지 못한 채 나는 서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가 내 일상에서 떠나간 것은. 늘 꿈꾸던 그가 옥상에

서, 자신은 날아오르겠다며 뛰어내린 순간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날 떠난 것은 훨씬 이후이다. 나는 잔상 안에서 헤메고 있었다.


나는 그를 꿈꾸는 새라 불렀다. 말이 화근이 되었는지 그는 진짜 새가 되

어 저 세상으로 날아가 버렸지만.


언제나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반짝이는 눈이 생각난다. 처음에 그에게 이

끌렸던 건 그 눈 때문이었지. 아. 그의 눈은 감겨지고 더 이상 반짝이지

않게 되었지만. 내 기억속에서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의 얼굴이 제대

로 기억나지는 않아도. 그의 눈만은 명확히 떠올릴 수 있다.


그는 무엇을 꿈꾸고 있었을까? 아마 자유였을 것이다. 진짜 자유. 허울

좋고 실속 없는 허수아비 자유가 아닌 당당한 권리로서의 자유. 타인에

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최

대한 충실한 자유. 그래서 날개를 달고 싶어했고, 결국 일생의 단 몇 초

만은 평생의 소원을 이루며 죽어간. 말 그대로 자신을 불태운 죽음을 맞

이한, 나의 꿈꾸는 새.


"난 날아오를꺼야. 고작 이 좁은 공간에 갖혀서, 평생 뜻대로 못한 채 남

에게 맞춰가야 한다는 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진짜 새를 아니? 진짜 새

라는 건, 우리 주위를 돌아다니는 흔해빠진 비둘기 따위를 말하는 게 아

냐. 사람들이 주는 모이나 받아먹으면서 자신의 털을 더럽히는 종자 말

고, 정말로 하늘을 나는 거야. 참새같은 것처럼 어디를 갈 수 있는 데도

동네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어디든 자신의 날개로 날아오를

수 있는 거지. 자신의 날개짓으로 바람을 가르면서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새. 멋지지 않아? 결국 그 새는.. 절대자유의 세계로 가는 거지."


그 말을 할 때 그는 세상을 향한 당당한 몸짓과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순간만은.


그는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절실히 바라던 자유의 세계에 있을까? 아니

면 힘찬 날개짓으로 어딘가의 바다위를 박차오르고 있을까. 그의 시체는

가루가 되어 초라하게 뿌려졌지만 진짜 그는.. 어딘가에.. 분명히..


"넌 결혼 안하냐!?"

"에이 엄마도.. 좋은 사람 생기면 한다니깐요."

"이놈아 그게 몇 번째야. 네 동창 성철이는 아주 참한 색시를 데려왔드

만. 곧 결혼한데더라."

"엄마도 참.."

웃으면서 넘기지만 가슴 한 구석이 아프다. 언제까지 속일수만은 없는

데. 아직도 그같은 사람을 찾아 헤메고 있다 말하기엔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주위의 질타는 그냥 웃어넘길 수 있어도 내가 그 말을 하는 순

간 어머니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기에...

나 어렸을 때 홀로 되셔서, 외아들인 나를 뒷바라지 하느라 일생을 바치

셨는데. 저 주름은 괜스리 생긴 것이 아닐진데..


어째서, 어째서 세상은 이리 각박할까.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 해서 그

리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 않은가. 사랑의 대상이 동성이라고 해서 모두

다 손가락질하고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것이 정상인가. 다수의 사람들과

다르다고 해서 이상한 눈초리를 받는 것이 옳단 말인가..


몇 안되는 친구라 믿었던, 그 중에서도 가장 친하다 믿었던 사람에게 커

밍아웃을 한 적이 있었다. 술의 힘을 빌어 간신히 밝혔던 나의 성 정체

성. 내 말을 듣던 순간 그 사람의 일그러진 표정을 난 놓치지 않았다. 아

니나 다를까. 내 좋지 않은 예상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게 행동한 그는 정

상인답게. 나와의 연락을 끊어 버렸다. 참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어려움

도 많이 나누었으며 마음을 같이 할 친구라 믿었던 그 사람은. 나의 말

한마디로. 나를 벌레로 만들어 버렸다. 마디가 열두개 쯤 있고 온몸엔 털

이 가득해서 꿈틀거릴줄만 아는 쓸데없는 벌레로..


다른 몇 명의 친구(였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난 잊지 못할 것이다. 나

를 바라보던 경멸어린 시선들. 그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차가운 마음

에 눈물흘렸던 그 기억은 절대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칼로

가슴을 도려내 인을 배긴 것처럼 가슴속 깊이 간직할 것이다. 동성애자라

고 하면 남창쯤으로 생각하는 그 눈빛. 절.대.잊.지.못.할.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옥상에 와 있다. 내 영원한 연인 꿈꾸는 새가 날개

를 펼친 바로 그곳이다. 그가 그렇게 자신의 꿈속으로 날아가버린, 이 황

량한 옥상에 와 있다. 여기저기 묵은 먼지가 민들레씨앗처럼 굴러다니

고, 차가운 시멘트가 외부인을 거부하는 곳. 나는 정확히 꿈꾸는 새가 꿈

을 향해 날아오른 그 자리에 서 있다. 그가 서서 내게 중얼거리던, 그리

고 세상을 덮을 듯 빠르게 떨어져서는 검은 색 무표정한 아스팔트에 떨어

졌던 바로 그 난간 위에 나는 서 있다.


투둑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비? 소나기인가? 일기예보에는 비

가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아니 내가 오늘의 일기예보를 봤던가? 오늘 나

는 뭘 했지? 오늘은 며칠이지?? 주위 사물이 나를 중심으로 크게 한바퀴

회전하며 엿가락처럼 휜다. 혼란스럽다.


이제는 꽤나 무게가 실린 물방울이 떨어진다. 딛고 있는 자리가 위험하

다. 마찰이 적어져 미끄러질 수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겁이 나거나

하진 않는다. 휘어버린 건물들 사이로 여러 가지 이미지가 교차한다. 어

머니의 주름살과 눈물. 나를 비웃던 사람들. 그 눈초리와 기분나쁜 태

도. 그리고 나를 떠난, 이제는 타인이 되어버린 친구. 모두의 얼굴이 엇

갈린다. 큰 웃음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친다. 모두들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

웃는다. 이젠 지친다. 이젠.. 이젠..


차가운 빗속에 나는 흠뻑 젖는다. 알 수 없는 기분에 나는 허공으로 발

을 한 걸음 내딛는다. 나도 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내 연인 꿈꾸는 새의 날개처럼 거대하지는 않아도, 내 작은 희망을 이루

어 줄 작은 날개가 있다.


바람이 날 중심으로 갈라진다. 주위 사물이 빠르게 스친다. 아. 그가 보

인다. 분명 그이다. 나의 선구자 꿈꾸는 새. 그의 눈이 보인다. 언제나

허공만을 바라보던 그 눈이 날 보고 잇다. 예의 그 반짝거림을 잊지 않

은 채. 무언의 웃음이 느껴진다. 아까와는 다른 동질감의 웃음. 나도 빙

그레 웃음을 짓는다.

그래 나도 널 따라 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이제는 아무도 우

리를 멸시하지 않는 곳에서 우리 다시...



- 지독하구만. 머리가 으깨졌어. 이 뇌수 튄 것좀 보게. 이래서야 죽어

서 제대로 생각이나 할 수 있겠나.. 나 원. 대체 왜 자살따윌 하는건지

모르겠어. 벌써 똑같은데서 2번째야.. 

99.11.14-99.11.17 edit 03.09.12. By RL.N.

posted by 레인레테
2005/11/18 05:17 RL.N ovel.
- 1 -

"나 예전에 임신했던 적 있었다."

혜정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머릿속에서 전자기타소리를 들

었다. 위잉~하고 슬라이드로 시작하는, 마치 기타를 중심으

로 하는 락그룹의 연주같은 소리를. 일레트릭 기타는 그렇게

한참을 몽환적으로 소리를 지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툭'하

고 3번줄이 끊어져 버렸다.

- 2 -

내가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작년 12월경이었다. 둘 다 수능

을 봤었고, 시험이 끝나자 할 일이 없던 처지였다. 나우누리

에 가입하고 그저 따분한 시간 죽이기용 채팅을 일삼던 때 난

그녀를 처음 알았다.


혜정은 소위 말하는 재수생이었다. 지난번 수능에서 답을 밀

려쓴 후, 1년 내내 공부만 했다고 한다. 이번 수능 결과는 그런

대로 만족한다며 '밀려쓰지만 않았다면'이라고 귀엽게 사족

을 달았다. 그녀의 말에 비추어 보건데, 고등학교때도 꽤나 공

부를 잘 했던 학생인 것 같았다. 여기까지가 내가 그녀와의

첫 채팅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 3 -

1999년 1월 13일. 수요일. 강남 CGV.12시. 혜정과의 첫 만

남 장소였다. 당시의 화재작이었던 '태양은 없다'를 보기 위해

서 만난 우리는, '비트'보다 조금 못한 '태양은 없다'를 보고나

서 일반적인 코스대로 밥을 먹고 가볍게 포켓볼을 치고 커피

숍에서 2시간쯤 이야기하다 헤어졌다. 어차피 이성으로써 만

난 게 아니었기에 서로 기대할 것도 없었고, 따라서 실망할 것

도 없었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실망할 만큼 최악은 아니었

는데다가 성격도 채팅 그대로였기에 우린 그냥 오랜만에 만

난 친구처럼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 4 -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채팅이라는 것은 언어에 마법을 걸

어 주기도 한다. 마치 오즈의 마법사가 가짜 마술로 양철인간

을 고치고, 사자를 용감하게 만들 듯이. 이 마법은 밤의 감수

성과 최고의 파트너가 되어 사람들을 홀연히 진실의 세계로

데려가곤 한다.

- 넌.. 네 자신이 좋아..?

사사로운 잡담을 하다가 갑자기 던진 그녀의 말은 순식간에

날 당황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네 자신이 좋아?? 무슨 뜻이

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자신감을 뜻하는 걸까?? 난 잠시

머뭇거리다가 '응'이라고 대답했다. 정말로 내 자신이 좋아 죽

을 지경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상황엔 그 말 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그래? ... 좋겠다.... 난 ...

난 모니터에 그녀의 다음 말이 떠오르길 기다렸다. 하지만

끝내 다음에 이어질 단어는 화면에 보이지 않았다. 다만

** 신혜정님이 접속을 해지하셨습니다 **


라는 단어의 나열만이 떠올랐을 뿐이다.


난감했다. 기다려야 하나. 그녀에게 전화를 해 봐야 하나. 잠

시 생각한 끝에 전화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의 짧은

말 속엔 우울한 진심이 들어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난 이 문

제는, 키보드로 시작한 만큼 키보드로 끝내야 할 것 같았다.

AM 1:46

AM 2:46

AM 3:15

결국 그녀는 그날 밤 다시 접속하지 않았다.

- 5 -
발 신 자 : 신혜정
제 목 : 미안...
보낸 시간 : AM 4:32

나야 혜정이. 아까는 그냥 나가버려서 미안해. 너 접속해지

시간 보니까 오래 기다렸던 모양이네. 다시 한번 진짜 미안.

그냥 좀 그렇더라구. 갑자기 너무 우울해서는. 너랑 얘기를

좀 하려 했었는데, 막상 말하려니까 생각이 정리가 안되는 거

야.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냥 두서없이 말해도 넌 다 알아들

을 수 있었을텐데. 헤헤. 어쩜 난 용기가 없었나봐. 진짜 나를

보여주기 무서웠나봐.


어제는 그렇게 접속을 끊고 침대에 누웠어. 조금 자면은 괜

찮아지겠지 싶어서.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네가 계속 기다릴꺼

라는.. 네 생각은 솔직히 못했고. 근데 이상하게 침대에 누워

도 잠이 안오는 거야. 그런 기분 알지? 몸은 너무나 피곤한데

잘 수가 없는 거. 마치 물먹은 솜이 한조각씩 분해되어 가면

서 흐느적거리는 것 같은 기분. 딱 그랬어. 결국은 그렇게 누

워서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면서 우울한 생각을 쫒으려 하

다가, 시계를 보니 어느새 4시가 훌쩍 넘었더라구..


다시 한 번 미안하구. 우리 기회가 되면 다음에 다시 얘기하

자. 안녕. 잘자.



- 6 -

시간은 가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했든, 혜정이가 어떻게 살

았든, 나와 혜정이와의 관계가 어떤식으로 변해가든간에 시계

바늘은 오른쪽으로 훌렀다. 그 후 혜정이와는 잡담 몇마디

뿐, 더 이상의 깊이있는 대화는 없었다. 그리고 난 모 대학의

학생이 되었다.



- 7 -

새내기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동기들이나 선

배들 얼굴을 익히고, 새로운 수업환경에 적응하고, 정신없는

삶을 사는 동안 혜정은 내 안에서 존재를 흐릿하게 하고 있었

다. 마치 유령이 벽을 통과할 때 스르르 사라지는 것처럼 그녀

는 조용히 내 마음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그

누구도 바라지 않지만 자연히. 당연히 그녀가 투명해진 것만

큼 그녀의 이야기는 살을 빼고, 빼고, 빼서 작은 콩팥만 해졌

다.


- 8 -

혜정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온 것은 4월 초쯤이었다. 수화기

에서 '나야'라는 말이 귀에 흘러들어왔을 때, 처음 만났을때

의 밝은 목소리와는 다른 낮은톤의 속삭이는듯한 목소리로 바

뀌었는데도 난 그녀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분명 그녀임에도

난 확인을 위해서 한번 더 물어야 했다. 누구... 라는 말이 떨

어짐과 동시에 그녀가 다시한번 말했다. '나라구'. 어쩐지 현

실감이 없는 목소리였다. 마치 수화기 저편에서는 무언가 알

수 없고 어두침침하며 음산한 것이 혜정의 흉내를 내는 것 같

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혜정이었다.


"어..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어쩌면 조금 목소리가 흔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네. 혹시 오늘 시간 있어?"

혜정은 여전히 그 낮은 음색의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다.

"응 시간 있어."

거짓말이었다. 오늘은 내가 속한 동아리의 총회 날이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그렇게 혜정을 거부하면 안될 것만 같은 생

각이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래서 난 그녀를 만나기로 했

다.

- 9 -

생각해보니 조금 한심해 보였다. 무언가에 끌려온 느낌. 그

렇다고 해서 싫은 기분은 결코 아니었다.


- 10 -

내 앞의 그녀는 변했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약간의 어폐가

있다. 정정컨대 그녀는 '분위기'가 변했다. 물론 겉보기엔 4개

월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조금 달라

진 게 있다면 옷의 두께 뿐. 그렇지만 그녀는 변했다. 무언가

가. 무언가가.

"나 학교 그만뒀어."

난 순간 흠칫했다. 재수해서 어렵게 들어간 학교를 그만두다

니. 그애가 얼마나 자신의 진학에 대해서 기뻐했는 지 아는

데..

"한 일주일 됐나.. 그정도 됐을꺼야. 잘은 모르겠지만. 곰곰

히 생각해 봤는데, 이게 뭔 가 싶어서.."

그녀가 얘기를 하는 동안 난 묵묵히 듣고 있었다. 솔직히 말

하자면 마땅히 대꾸해야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거니와, 침묵

하는 동안 그것이 더 그녀가 얘기하는 데 도움이 될 꺼라는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가 언젠가 너한테 네 자신을 좋아하냐고 물어본 적 있었

지? 그때 넌 응이라고 대답했었고. 맞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그 말을 듣자 그것이 키워드가

되어 나를 98년 12월의 파란 모니터 화면 앞으로 돌려놓았다.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그녀는 가만히 내 얼굴을 보더니 짧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

었다.

"솔직히 말할께. 내가 너에게 했던 얘기들. 다 거짓말이야.

고등학교 얘기나 재수, 기타등등의 이야기들. 심지어는 방금

말했던 대학 그만뒀다는 것 까지도. 지금 네 눈 앞에 보이는

난 네가 아는 혜정이가 아냐."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방금 들은 말은 무슨 뜻이지?

혜정인 혜정이가 아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그때도 그랬듯이

표현 능력이 그리 뛰어난 게 아니라서... 그냥 나오는 대로 말

할게. 이해해 줄 수 있으리라 믿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개를 끄덕이는 일 뿐이었다.


"너 그런 느낌 알아? 어느날 주위를 둘러봤는데 내 주변엔 아

무도 없는거야. 친구도. 가족도. 꼭 황량한 벌판에 혼자 서있

는 느낌.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가 듬성듬성 막 자라있을 뿐,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에. 마치 나만 존

재하는 듯한.."


혜정은 잠시 말을 끊고는 자신앞의 쥬스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뗐다.

"무서웠어. 그렇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방에 틀어박혀 얼굴 모르는 사람들과 나누는 겉보

기의 이야기 뿐이었지. 그러다가 널 만난거고. 지금에 와서야

고백하지만 나 너 만난것도 엄청난 용기 낸거야. 넌 행운아라

구."

그녀는 하던 말을 중단하고는 픽 웃었다.

"그래서?"

"그래서? 아 응. 그래. 내가 널 알면서 느낀 게 뭔 줄 알아?

난 헛살았다..라는 거였어. 이 나이를 먹을 때까지 주위에 사

람 하나 남겨놓지 않았다니. 나에 비해 넌 행복해 보였어. 잘

은 모르겠지만 늘 사람들 사이에 둘러쌓여 있었고..."

그랬던가? 난 그런 점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휴. 어쩌면 난 널 보면서 대리만족했던 건지도 몰라. 나 담

배 하나만 피울게."


내가 약간은 놀란 목소리로 '응'이라고 하자 그녀는 자신의

백에서 담배를 꺼내고 능숙한 포즈로 불을 붙였다. 내가 아는

혜정인 담배나 술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애였는데..


"놀랐니? 나 이거 한 지 꽤 됐는데. 너 알기 전에도. 음.. 얘

기 계속할게. 하여튼 어쩌다보니 넌 내 주위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버린 거야. 난 절대 널 놓치기 싫었지. 다시 황량한 벌판

으로 돌아가긴 싫었으니까. 그래서 난 나를 조금씩 포장해서

는 네게 내놓았어. 너에게 알맞은 혜정이로. 내 말 이해할 수

있겠니?"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란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일뿐이었다.


"어느새 난 원래의 나와 너의 혜정이와의 두 역할을 하게 된

거지. 그런데 이거 .. 처음엔 괜찮더니 나중에 시간이 지나니

까 두가지 역할의 괴리감이 생겨버리더라구. 꼭 징검다리 중

에 처음과 끝만 있고 중간은 없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이

두 역할이 헷깔리기 시작했어. 아무리 두 역할의 성격이 판이

하다 해도 연기하는 건 나 하나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결

국은.. 내가 너한테 네 자신을 좋아하냐고 물은 날까지 오게

된거야."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구나. 혜정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

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이걸 다 설명하려 했어. 그 날. 그런데, 도저히 자신

이 없는거야. 네가 날 싫어할까 봐."


분명히 그랬다. 지금 나는 이 상황을 머리로 이해하되 몸으

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어느 공포영화처럼 머리

를 손으로 들고다니는 사람같았다. 아아.. 힘들다. 그리고 무

언가가 내 안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바닥으로. 와장창 쨍

그랑 쾅.

"그 날 이후론 어쩐지 네게 말걸기가 무서워져서. 그냥. 그렇

게 된 거야."


난 여전히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응. .

"마지막으로, 진짜 내 얘기를 할게. 이름은 박민혜고 나이

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고통없이 벙어

리가 된 것 같았다.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고막으로 느껴지

는 웅-소리만이 내 주위를 감싸고 돌았다.

내가 그렇게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어지러워하고 있을 때 혜

정, 아니 민혜가 다시 말을 했다.

"나 옛날에 임신했던 적 있었다."


- 11 -

끊어져버린 기타줄은, 다시는 사용할 수 없다. 반드시 다른

것으로 교체해야만 한다. 새 줄은, 소리가 매우 좋긴 하지만,

다른 줄들과 조율을 하고 길들이려면 꽤 오래 걸릴 것이다. 특

히 쉽게 끊어지지 않는 3번줄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99년. 소설과는 전혀 관계없는 수업시간에 심심해서... By RL.N.
posted by 레인레테
2005/11/18 05:16 RL.N ovel.
고양이의 눈을 본 적 있니?? 아니아니.. 동화책이나 만화같

은데서가 아니라 진짜로 내 눈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말야. 아마 본 적 없을 꺼야. 너도 알다시피 고양이는 그리 얌

전한 동물은 아니니까. 혹 언젠가 봤다면 넌 굉장한 행운아

야. 쉽지 않은 일을 겪은 거니까..


각설하고, 혹시라도 그 눈을 볼 기회가 있거든 절대 놓치지

마. 그 인간의 눈과는 다른 신기한 눈을..


내가 처음 고양이의 눈을 본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 누군

가가 키우던 거였는데, 그냥 우연히 길을 가다가 본 거지. 살

이 포동포동하게 찌고, 고양이답지 않게 사람에게 잘 앵기는

웃기는 고양이였지. 아마 주인이 길을 잘 들였던 모양이야. 조

금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 고양이는 꼭 집에서 키우는 애

완견 같았어. 난 독서실에 들렀다가 늦게만치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거든. 우리 집 가까이에 거의 다 왔던 터라 친구들과는

다 헤어져 혼자 걷고 있었고, 그 캄캄한 밤에 고양이 울음소리

를 들었지. 뭐라고 잘 설명할 수 없는 높은 톤의 아기 울음소

리. 아니 그보다 훨씬 갸날픈..


근데 이상한 건, 그 소름끼치는 소리가 친근감있게 들렸다

는 점이야. 소리는 바로 내 발 밑에서 나고 있었어. 난 잠시 쭈

그리고 앉아서는 고양이를 쳐다봤지. 그 당시에는 고양이의

몸짓이 신기해서 별로 느끼지 못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눈.. 너무 투명했어. 눈동자도 별로 없는 데다가 눈동자 속

이 비치는.. 마치 애들 구슬치기하는 그 유리구슬이 눈이 있

던 자리에 박혀버린 느낌이라고 할까? 나중에 그 고양이의 전

체 생김새는 잘 기억나지 않아도 그 눈만은 뇌리에 선명하더

라.


두 번째는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는데, 야생고양이었나

봐. 내 방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는데 책상 옆으로 난 창문

으로 뭔가가 있다는 게 느껴진거야. 고양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소스라치게 놀랐어. 그런데 그 고양이는 내가 자신

을 보고 놀란 것을 봤는데도, 꼼짝도 안하고 날 보고 있었어.

마치 내게 원한이나 있는것처럼 무슨 집념같은 게 느껴지는

것 같은 눈빛이었지. 우습지만 난 그 고양이한테 순간 압도당

해버린거야. 나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작은 고양이에게. 그 눈

길.. 잊지 못할꺼야.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하는듯한 느낌. 목

표를 집요하게 쫒는 스토커의 카메라..


그 후로 난 닥치는 대로 고양이를 연구하기 시작했지. 특히

그 눈에 대해서. 백과사전을 뒤적거려보기도 하고, 소위말하

는 지식 검색을 찾기도 하고. 어처구니없이 방대하게 펼쳐진

지식의 바다 인터넷을 항해하기도 했었어. 내겐 고양이의 눈

에 대해서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처럼 느껴졌었거든.


그러던 어느날 난 다시 고양이의 눈을 보게 됐어. 그런데 이

번엔, 고양이에게서 아닌, 인간에게서 고양이의 눈을 보게 된

거야. 얼마나 섬뜩했는 줄 아니? 그 비어있는 듯, 주시하고 있

지만 흥미없다는 시선. 눈동자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도 집

요하게 먹이를 쫒는 그 눈. 그 사랑스러우면서도 끔찍한 유리

구슬..그걸 사람에게서 본 거야. 보는 순간의 그 느낌이란.. 온

몸의 소름이 쫙 돋은 채 머릿속이 하얘지더라. 그게 언제쯤이

었냐구? 글쎄 언제쯤이었는지는 확실히 생각이 안 나. 한달정

도 된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어제인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였냐면.. 우리 집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드

눈 순간에 그 눈빛과 마주쳤었어. 난 내가 고양이 눈에 너무

집착한 환영이라고 생각했지. 화장실에 고양이같은 것이 있

을 리가 없잖아? 먹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잠이 덜 깼나보다

하고 다시 한번 얼굴에 물칠을 한 뒤 고개를 들었는데... 그제

서야 난 고양이 눈이 왜 화장실에서 보였는지 깨달았어.





그건... 거울에 비친 내 눈이었던 거야...  
99년 어느날에. By RL.N.
posted by 레인레테
2005/11/18 05:15 RL.N ovel.

그대 먼 곳만 보네요. 내가 바로 여기 있는데.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날 볼 수 있을 텐데...


어느샌가 흘러간 노래가 되어버린 일기예보의 '인형의 꿈'이

라는 노래가 레코드점에서 흘러나온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

저 멜로디가 괜찮은 노래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네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불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

는 와닿는 의미가 절실하다.


언제부터일까 그녀를 바라보게 된 건. 차가운 달빛이 그녀

의 얼굴을 감싸돌던 밤이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처음봤을때부

터인지. 혹은 그 다음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언젠

가..이겠지. 시기가 언제였는가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어느샌가 내 삶

전부가 되어버린 그녀를. 단지 널 사랑해.


그녀도 분명히 나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한번도 그녀가 나에

게 먼저 인사를 건내거나 한 적은 없지만 나를 인식하고 있음

을 난 느낄 수 있다. 내가 그녀를 바라볼 때 한번도 지워지지

않았던 입가의 미소가 그것을 증명한다.


너무 까맣다 못해서 파란. 크레파스로 칠하고 덧칠하고 또

칠함으로써 파란색과 검은색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어느 밤.

난 처음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었다. 너무 작은 소리여서 그

녀는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난 그녀의 웃음

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내 뇌리에 박혀버렸던 블루

사파이어빛 그 날..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 그녀를 가지고 싶다. 그녀의 작고 도

톰한 입술에 입맞추고 싶다. 그녀의 완벽한 실루엣을 느끼고

싶다. 날 바라보지 않는. 언제나 공허하게 허공만을 바라보는

그 눈에 나를 비치고 싶다. 그녀의 새하얀 피부를 만지고 싶

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갈까. 가서 그녀와 나 사이를 가로막은

유리를 부셔버리고 그녀를 안을까. 그래도 될까. 아니야 그건

그녀에게 피해를 줄꺼야. 하긴 또 모르지. 그녀도 내심 그것

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그래도.. 아니야.. 그래도.. 혹시 또 모

르지.. 모르지.. 모르지...



쨍그랑!



"정말 이상한 녀석입니다. 뭣하러 여성복 집을 털려고 했을

까요? 평소에 장사가 잘 되거나 하던 집도 아니었는데 말입니

다. 게다가 더 이상한 건 잡힌 후 녀석의 태도입니다. 쇼윈도

에 전시되어 있던 마네킹을 꼭 붙들고 놓칠 않습니다. 뺏으려

고 하면 사납게 달려듭니다. 여성복집 사장에 의하면. 그 사

람 매일같이 그 집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고 가곤 했답니다. 좀 의심스럽긴 했지만 그냥 유리에 자

신을 비춰보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드디어 그녀가 내게로 왔다. 이제 그녀는 내 것이다. 이름을

물어봤지만 대답하지 않아서 내 마음대로 이름을 짓기로 했

다. 뭐가 좋을까.. 희주? 은혜? 연정? 은경..?? 아아... 잘 믿어

지지 않는다. 그녀가. 나의 그녀가.. 꿈에서도 동경해 마지않

던 그녀가 이렇게 내 옆에 있다니! 이 사랑스러운 얼굴이 내

것이라니. 이 아름다운 입술에 입맞출 수 있다니.. 그녀의 귀

에 대고 속삭일 수 있다니.. 행복하다. 난 정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저쪽에서 사람들이 날 쳐다보고 있다. 뭐라고 웅성웅성대며

간간히 손가락으로 날 가르키기도 한다. 상관없다. 난 나의 그

녀와 있으니까. 아까 나의 그녀를 탐내는 사람이 있었지만 난

절대 그녀 손을 놓지 않았다. 조금도 손대지 못하게 했다. 그

녀는 내 것이다. 말을 하지 못한다 해도. 따뜻한 손길이 없어

도. 시체처럼 사그라진 생명이라고 해도..

나의 연인. 나의 소유... 이젠 절대로 영원히 놓지 않아...

99년. 어리숙한 어느날에. By RL.N.

posted by 레인레테
2005/11/18 05:11 RL.N ovel.
두 개나 세 개쯤 담배를 빼 물고 나면, 이런 기분이 들어. 처

음에는 혀끝에 타르가 느껴져. 마치 까만색 가루로 된 기름이

혀끝에서 번져나가는 것 같아. 그리고는 흔히 말하듯 연기가

목구멍 속으로 들어와. 자고 일어났을 때 목이 칼칼해져서는

본의 아니게 허스키해진 목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연기는 목에서 걸려져서는 나쁜 성분들만 먼지덩어리처럼 뭉

쳐서 폐로 흡수되는 거야. 니코틴과 그 외 여러 성분들이 서서

히 내 공기펌프를 썩어가도록 만드는 거지. 시나브로 기분나

쁘고 짙은 피멍을 들게 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런 내 말이 너

에게는 잘 와닿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내겐 단순한 인체모형

이미지가 아니라 털이 곤두선 고양이의 감각처럼 와닿는 거라

구.


그런데도 왜 담배를 피느냐고? 글쎄.. 혹자는 습관성이라고

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일상생활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라

고도 하지. 심지어는 커피맛을 좋게 느끼기 위한 조미료 정도

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그런 말들도 다 일리가 있긴 해. 하

지만. 적어도 나에겐 담배는 이런 의미야.


프랑스의 작가 중에 사드라는 사람이 있어. 새디즘과 마조히

즘이라는 말의 시초가 된 사람인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

은 누구에게나 가학적인 성향과 피학적인 성향이 있다는 거

야. 쉽게 말하면 공격하고싶어하는 성향, 그리고 공격받고 싶

어하는 성향이 있다는 거지. 즉 인간은 사람을 괴롭히고 싶은

욕망이나 괴롭힘을 당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는 말이야.

난 담배를 피움으로써 그 두가지 마음을 다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해. 사람을 괴롭히고 싶어하는 것이나 괴롭힘 당하고 싶

어하는 것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되면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담배를 피워 자신의 몸을 괴롭힘으로써 희열을 느낀다고나 할

까..


작년이던가. 한 코메디언이 담배로 인한 폐암으로 죽었을

때 언론은 참 시끄러웠었지. 모처럼만에 큰 기사꺼리를 잡았

잖니? 그 때 유행하던 신문기사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

를 본 적이 있었어.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전 국민에게 담배를 끊으라는 것

은 말도 안된다. 물론 끊고 싶은데 의지가 부족하여 힘겨워하

는 사람이야 도와줘야 마땅하겠지만, 담배 한 모금에 인생 쓴

맛을 묻고 내뿜는 연기에 삶의 희망을 보는 사람들, 즉 진정

한 애연가들에게 낙을 뺏어가지는 말라.. 』


꽤나 장문의 글이었는데, 대충 요지는 위와 같았어. 어때? 맞

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외제 담배중에 '말보로' 라는 게 있지. MARLBORO라고 쓰

는데, 일설에 따르면 이 글자는


Man Always Remember Love Because Of Romans Over

의 약자래. 남자는 항상 끝난 낭만에 사랑을 기억한다.. 는 건

데 여기에 얽힌 얘기가 또 있어. 집안의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

과 헤어져야 하는 남녀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 여자가 가야

할 시간이 되자 남자는 담배 한가치 피울 때까지만 함께 해 달

라 했고, 여자는 울면서 승낙했지. 하지만 그 당시엔 종이를

말아서 피우는, 필터가 없는 담배뿐이어서 담배는 너무 빨리

타 들어갔던거야.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고 여자에게 영원한

안녕을 고한 남자는 결국에는 필터가 있는 말보로를 만들었다

는, 마치 박효신의 노래같은 이야기. 뭐 그건 고도의 상술인

지 혹 작은 얘기가 크게 부풀려진건지, 혹 누군가가 지어냈는

지는 모를 일이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마지막으로 보내면서

피는 담배. 과연 맛이 어땠을는지..


많은 영화와 광고에서의 멋진 이미지만이 아니더라도, 이건

이 것 자체만으로도 느껴볼 가치는 있는 거라구. 인디언들이

약초로 쓰던 걸 가져와서는 팔만큼 팔아놓고는 마약이라 규정

지어버린 웃기는 나라 말 따윈 신경쓰지 말고. 어때? 이 사연

있는 담배?"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담배를 내밀었다.

MARLBORO라고 쓰여진 담배였다. 멋진 붉은색 케이스에 담

겨 있었고, 필터 부분은 시가 색이었다. 난 무언가 홀린 듯 그

가 주는 담배를 받았다. 터무니없이 긴 말이었고, 다 알아들

은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친한 사이도 아닌 녀석과 나

의 관계에서는 조금 기묘한 일이었다. 적어도 녀석과 나는 방

금 전에 길거리에서 만났을 뿐인 사이인 것이다. 어쨌든 난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쓸려 담배를 받아 불을 붙였다. 몇 번의

콜록거림. 약간의 어지러움을 동반한 끝에 난 한 가치를 다 피

웠다.


녀석은 내가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발로 비벼 끄는 순간까

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는, 내 어깨를 몇 번 툭 툭 치고

는 자신의 오토바이로 갑자기 출발해버렸다. 순식간에 멀어져

버린 그를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멍하니 쳐다보

는 일밖에 없었다. 어쩐지 만화같은 일이었다. 난 녀석의 이름

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난 녀석에게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대답조차도.


어찌됐든 난 이름도 모르는 녀석 덕분에 담배를 배웠고, 조

금씩 늘어서는 이젠 주머니 속에 여분의 담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난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빼 물다가 말보로의 붉은 케이스를

보면 녀석이 생각나곤 했다. 다시끔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마

다 점점 의문점만 늘어나서 물음표가 내 대뇌속을 헤집고 다

니는 바람에 난 녀석과 만난 지 꼭 일년이 지난 후에야 그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옅게 할 수 있었다. 이제 그때 기억의 잔

해는 내가 거의 항상 입에 물고 다니는 말보로의 케이스를 제

외하고는 녀석에 대한 생각이 옅어질 때 쯤이었다.


그런데 오늘 꼬박 일년이 지난 오늘 녀석을 만난 것이다. 난

내 차 안에서 예의 그 말보로를 입에 문 채 신호등의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내 옆에 어디선가 본 듯한 오토바이가

다가왔다. 녀석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차의 클랙션을 울리자

녀석은 썬그라스를 조금 아래쪽으로 내리고는 날 쳐다보았다.


"와! 오랜만이야!!"


너무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던 것이 조금은 그에게 당황스러

웠는지 그는 약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나를 쳐다보았

다.


"누구..세요??"


의외의 말. 녀석은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게다가 일년

전과는 다르게 존댓말이라니. 하긴 이미 일년이라는 꽤 긴 시

간이 지났기도 했고, 나에게만 이상한 일이었을 뿐 그에게는

그런 일이 일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사람을 대하다

보니 날 기억 못할 수도 있지..난 그렇게 이해하고는 일년전

의 일을 대충 설명했다. 내 설명을 듣던 그는 그때서야 날 기

억해 내는 것 같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아.. 제가 아르바이트 할 때 만났던 분이신가보죠??"


아르..바이트??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녀석은 날 상대로 뭔

가를 팔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건을 홍보한 것도 아

니다.


"아니 .. 아르바이트..는 아니고.."


"하핫. 제가 말보로 사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 마주치신 것 아

니에요? 그것 참.. 전 당연히 아시고 계신 줄 알았는데.. 그건

그냥 아르바이트였어요. 말보로사의 홍보 쇼 같은 거죠. 은연

중에 말보로를 뇌리 속에 심는 거에요. 그 증거가 손에 들고계

신 말보로네요. 그 당시엔 비흡연자를 흡연자로 만든다고 해

서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아서 서둘러 조기마감했던 행사였는

데... 후훗. 그 홍보 의외로 효과가 좋았나보네요. 말보로를 들

고 계시는 걸 보면"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머릿속에

말보로와 녀석이 했던 말과 목소리와 오토바이의 엔진 도는

소리와 내 어깨를 두들기던 감촉이 마구 헝클어져 담뱃재처

럼 하얀 담배연기속에 침재하고 있었다.


내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것은 말보로의 담뱃재가 내 손목

에 떨어져서였다. 어느샌가 신호등은 파란 불로 바뀌어있고,

녀석은 출발해 버린지 오래였다. 뒷차가 빵빵대는 소리를 들

으며 간신히 차를 출발시킨 내게 남은 건, 이제는 필터밖에 남

지 않은 말보로 담배뿐이었다..


2002. 11. edit 03.07.20. By RL.N.
posted by 레인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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